2016년 5월 30일 월요일

믿음은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공직자는 무릇 청렴해야 한다”위 명제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이견이 있다 한들 함부로 공개적으로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이는 이 명제가 상식이거니와, 하나의 도덕률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문장 자체가 상식이라고 해서 그 의미까지 모두가 훤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가 공직자이며, 왜 청렴해야 하는걸까?

 사전을 찾아보면 공직자는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며, 공직이란 관청이나 공공 단체의 직무를 말한다. 또한 관청은 국가 사무를 취급하는 국가 기관을, 공공 단체는 국가로부터 그 존립의 목적이 주어진 법인을 지칭한다. 쉽게 말해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국가론에 대해서까지 얘기하기엔 내 지식수준이 너무 가련하기에 상세히 얘기할 순 없지만, 기본적으로 국가기관은 국민들의 일을 대신 하는 곳이다. 국민은 그 댓가로 세금을 모아 내어 국가의 일을 할 자금을 모으고, 공직자의 인건비를 충당하는 것이다. 대가를 받고 일을 대신 해 주는 만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사용자인 국민들에게 알려주어야만 한다. 여기까지가 의무이다. 그들이 청렴하지 못하게 일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걸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린 더이상 그들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측면에서 공직자가 청렴해야 하는 건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서다. 이상적이고 순진한 얘기다. 아마도 청렴하지 못할 바에야 더이상 그 일을 하지 않아도, 그 대가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지저분할 것이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줄 의무를 강제할 자들 또한 그들 자신이기에 일이 제대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이다. 일을 제대로 하라고 준 권리, 혹은 대가를 이용해서 의무를 가려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려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다. 범위를 국가에서 하나의 동아리로, 극적으로 좁혀보자. 범위가 좁아지면 내 피부에는 더 가까워지는 법이다. 동아리의 임원은 법적인 정의에 따라 공직자는 아니다. 하지만 철학적 의미에서 국가의 공직자와 동아리의 임원은 궤를 같이 한다. 그들은 일의 대가를 받아야 하고, 늘 의심받는것이 자연스럽다. 믿음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데 믿음을 받는것은 요행일 따름이다. 남이 나를 의심할 이유는 많은데, 반대로 믿어주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의심받지 않으려면 사전에 모두 보여주면 되고, 의혹이 생긴다면 해명하면 될 일이다. 나를 의심한다고 해서 화낼 이유가 없다. 인간적으로 섭섭할 수는 있겠으나, 의심받고 또한 해명하는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일이다. 그 일 하라고 앉혀놓은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응당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 실상은 그냥 총회날 안 온 놈에게, 만만한 놈에게, 친한 놈에게 임원을 시켜 봉사하게 만들고 있으니 결국 이것도 한낱 이상적인 얘기지만.

 나는 밴드를 하나 이끌고 있고, 몇몇 음악인들로 이루어진 소모임의 리더를 맡고 있다. 전자야 뭐 그렇다 치고 후자는 리더라는 표현이 좀 민망하지만, 모임 내에서 주로 일을 벌리고 맡아 한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내가 일을 맡아 하는 대신 얻는 댓가는 그 단체에서 벌리는 일을 내 뜻과 비슷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차후 내 자신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으니, 그리고 그게 누가 나에게 강요한 것이 아닌 스스로 하는 기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밴드에서도 모임에서도 내가 하나씩 크게 말아먹은, 혹은 지연되는 일이 있는데,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하게도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는 정도는 아니다. 첫째로는 그들의 후한 인품 덕분이고, 둘째로는 내 노력을 잘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창 일을 크게 벌리던 때에는 매월 회비 사용내역을 원단위로 상세히 공개하고, 회비는 모두의 동의를 거쳐 결정하여 걷었다. 어떤 일을 벌릴 때에도 전원의 동의 없이 하지 않으려 애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땐 설득하거나 일 자체를 접어버린다. 그런게 쌓여 지금은 내가 조금 태만해도 감사히 계속해서 믿어들 주시는 중인 것 같다. 감히 내 스스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대체로 믿음은 이런 식으로 얻어내는 것이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봤던 어떤 글을 보고 생각이 들어 써보았다. 대나무 숲에 올라온, 회비 걷어 남은 돈은 어디 숨기냐는 글이었다. 그 글도 약간 치사한 면은 있었지만, 댓글은 대체로 비난 일색이었다. 제일 한심한 건 ‘네가 하면 되겠네’류의 댓글들이었다. 대학생씩이나 되는 분들이 어디 그런 유치한 말씀을. 대체로는 ’안 해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모른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어디 그런 당연한 말씀을. 안 해보면 당연히 모른다. 아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자들이 알려주는게 의무다. 초반에 말했듯, 그들 자신을 위해서다. 의심받기 싫다면 그런 일은 누가 물어보기 전에 대답해주면 된다. 그게 귀찮으면 의심받고 나서라도 해명해주면 된다. 다만, 반복되는 의심은 신뢰를 무너트리고 무너진 신뢰는 다시 회복되기 쉽지 않으므로 애초에 의심받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는게 본인 신상과 정신건강에 좋다.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이런다’는 의견도 많았다. 해야될 일을 안해놓고 힘들어서 그랬다는 투정은 아무도 안 받아준다. 믿음은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덧붙여, 의심하는 자들은 상대에 대한 예의상, 찾아볼 수 있는 정보는 좀 찾아보고 의심하는게 좋다.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으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힘 빠진다.

2016년 5월 25일 수요일

2016. 5. 25.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여자친구가 우리집에 왔고
나는 그사람을 위해 커피를 내렸고
그사람은 피아노를 쳤다.
우리가 헤어진 후가 아니었다면 참 행복한 순간이었을텐데.
그사람과 관련된 가장 선명하며 흐릿 기억중 하나.

2016년 5월 21일 토요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보려는 노력

 내까짓게 감히 이런 글을 써도 될까 싶다. 딴에는 신중하게 접근하고자 노력할테지만, 내 글의 무게에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사이 나를 짓누르는 이 생각들을 풀어놓지 않으면 안 될것 같아 펜을 든다.

 내게는 여동생이 한명 있다. 얼마전 오랜만에 본가에 가서 동생과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목이 말라서 물을 한잔 마셨다. 컵을 싱크대에 내려 놓으려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동생에게 말했다. (자취를 하고 보니)물 한모금 먹자고 소비되는 컵이란 엄청난 거 였다고. 예전엔 몰랐었다고. 쌓이는 설거지에 대한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그러자 동생이 약간의 냉소와 함께 내게 한 말은, 왜 몰랐을까, 였다. 할 말이 없었다. 집에 사는 동안, 나는 컵을 쓸 줄이나 알았지 씻을 줄은 몰랐던거다. 망나니 였던거지 뭐, 하고 동생에게 말한 뒤 컵을 씻었다. 그리고 많이 부끄러웠다. 또한 미안했다. 동생은 설거지를 했고 나는 안 했다. 엄마는 설거지를 했고 아빠는 안 했다. 그리고 하나의 행동은 그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자인 내 동생은 남자인 나보다 불리한 가정사를 겪었다. 동생이 말해주기 전까지 난 전혀 몰랐다. 내 스스로 얻어낸 것이 아닌 ‘우위’를 누리는 동안 스스로 그걸 알 수가 없었던 거다. 지금도 난 단지 어렴풋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 뿐일게다. 실제로 겪지 않고선 절대로 온전히 알 수 없는 법이다. 나는 어쩌다보니 남자로 태어난 덕에, 여자로 태어난 동생이 겪고 느끼는 것을 절대로 정확히 공감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제3자, 아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가해자인 내 입장에서 헤아려보려 노력하는 것 이상은 도저히 할 수가 없는거다. 이게 내 글이 가진 무게의 한계이다. 부자가 쫄딱 망해보면 가난한 이의 마음을 좀 더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병사로 복무한 적 있는 장교는 그렇지 않은 장교들 보다는 병사의 심정에 대해 더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색인종이 당하는 차별을 백인이 공감할 수 있을까? 물론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의 이야기가 있는 법이고, 타인에게 완벽히 공감하는 일이야 당연히 불가능 할테지만 개인대 개인이 아닌 ‘남자’로서 ‘여자’가 느끼는 차별, 공포 등은 함부로 안다고 덤벼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줍잖은 노력이나마 해보고 싶다면 우선 그걸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고, 또한 그걸 본인의 기준으로 해석하거나 재단하려 들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실제로 느끼는 것을 감히 다른 누가 평가할 수는 없다.

 돌고 돌았다. 나를 짓누르는 바로 그 생각은 강남역 살인사건이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수많은 여성들의 분노와 공포를 접한 뒤 정신이 아득해졌다. 범인 스스로가 ‘평소에 여자들에게 무시를 당해서’ 저질렀다고 진술한, 실제로 일어난 여성혐오범죄가 이렇게 왈가왈부할 대상이라는게 이상했다. 고작 하는 이야기가 남성을 일반화하지 말라는 비난이라니. 이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친 개별화의 오류다. 찾아보니 이런걸 ‘나태한 귀납’이라고 한단다. 나는 모든 남성이 잠재적 범죄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그 누구도 그런 얘길 하지 않았다. 이런걸 ‘허수아비 때리기' 라고 한다. 대신 그들은 ‘모든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다’에 더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순히 여자라서 살해당한 실제 사례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추론이다. 심지어 그런 사례가 있기만 한게 아니라, 많다. 많은 남자들은 왜 그들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남성을 변호해보자면, 도저히 그냥은 알 수 없는 성질의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실체를 온전히 알지 못하기에 허수아비를 때리거나 스스로 중립적이라 착각하며 방관자의 위치에 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을 비판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기는 잘못한게 없는데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최소한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의지가 없는 자에게까지 할 말은 없다. 공감의지가 떨어지는게 자랑은 아니다, 정도? 타인이 나로 인해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면 가만히 있는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싸우고 싶지 않다면 우선 잘못된 부분을 인정해야 한다. 깡패가 누굴 패고 있는데 팔짱끼고 서 있는건 하나도 중립적인것도 정의로운것도 아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사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의 아픔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이유없이 죽어야했던 한 생명에 대한 애도이다. 그 죽음에 같이 공포를 느낀 이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 공포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제안이다.

2016년 5월 20일 금요일

도대체 왜 세상이 불의로 가득한건지 알게 되면 속이 좀 편할까?

2016년 5월 16일 월요일

상식적인 것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어떤 집단이 있다. 이 집단은 ‘여성 혐오’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의견을 표명하여 (내가 생각하기에 긍정적 의미의)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자세하게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몇몇 드러난 논쟁들을 보며 내가 느낀 건, 어떤 대상을 평가할 때 그 대상의 한 부분으로 전체의 평가를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극히도 고리타분하며 당연해보이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그들이 비난하는 대상의 평가와 그들 자신에 대한  평가 모두를 향해있다. 히틀러같은 희대의 극악한 범죄자도 어쩌면 동물권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또 어쩌면 신앙심 깊은 친절한 이웃이 지독한 동성애 혐오자일 수 있는 것이다. 연쇄살인범으로 밝혀진 자의 이웃들이 그는 평범하고 친절한 이웃이었다는 증언을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보통 이런 상황에 “그가 친절한 이웃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극악무도한 살인마였다”라고 평하게 되지만, 그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제 3자의, 조금 무책임한 시선에서 그는 친절한 이웃이며 또한 연쇄살인마이기도 했던 것이다. 두 의견은 일견 비슷해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혀 다른 의견이다. 전자는 그간 알고 있던 사실이 ‘진실’이 아님을 내포한 의견이다. 같은 대상의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 사실을 접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가 살인마인줄 알았더니 사실 친절한 이웃이었다”와 같이 표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극단적인 예를 들기는 했지만, 요는 하나의 대상이 하나의 성질만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의 나쁜 짓을 용서해 줄 필요는 없으며, 반대로 나쁜 일을 하는 집단이 하는 좋은 일을 평가절하할 필요도 없는거 아닐까?

 처음에 얘기했던 집단이 비난하는 한 만화가가 있다. 이유를 최근에 알았는데,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이유는 이렇다. 그 만화가는성형수술로 인해 비슷한 외모를 갖게 된 여성들을 ‘강남미인도’라는 것으로 희화화했고, 이는 아름다워지기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무시하고 그 요구를 어떻게든 쫓아가고자 노력한 이들, 물론 사회적 강요를 당하는 약자들을 조롱하는 비열한 짓이라는 거다. 동의하는가? 혹은 단순히 재미를 위해 그린 만화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애꿎은 이를 공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나는 많은 경험을 쌓거나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기에,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상식’을 이용해왔다. 사실은 이렇고 배경은 어떻고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미로에 갇히지 않기 위해, 옳은 일은 상식적이어야 하마 직관적으로도 옳은 일이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정말 그럴까?

 상식: [명사]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유의어: 교양, 보통지식, 상규) 상식적: [관형사, 명사]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이 되는, 또는 그런 것

즉, 상식이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흔히 그러하다 일컬어지는 것’인 것이다. 몇년 전, 나는 이와 같이 ‘상식’을 통해 어떤 일을 판단하는데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상식이란 세상이 변하며 함께 달라진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불과 백년 전만 해도 백인들이 가진 흑인에 대한 우월한 지위는 상식이었다. 남성만이 투표권을 갖는 것이 상식인 때가 있었고, 투표를 통해 주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상식이 된지도 그리 오래지 않다. 신앙심이 믿음이 아니라 상식인 시절도 있었다. 모두가 당연히 여기던 상식을 깨부순 자들이 좀 더 옳은(혹은 옳다 여겨지는)사회를 만들었다. 또한 그것은 새로이 상식이 되어 세상이 옳게 굴러가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상식 덕분에 우리는 독재자의 지배를 받지 않거나, 받게 되더라도 저할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집단’이 만화가를 비난한 것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정말 그들은 ‘그 만화가’를 비난한 것일까? 그들은 (최소한 내게는)효과적으로 기존의 잘못된 상식을 공격했다. 똑같은 얼굴을 한 소위 ‘강남미녀’를 그저 좀 한심한, 그러나 나와는 상관이 없는 타인으로 여기던 내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건지 비로소 느끼게 해 준 것이다. 공고해보이는 상식의 요새는 이런 균열로부터 붕괴에 이르게 된다. 외모가 아름답지 않은 사람을, 혹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을 비웃거나 조롱하는 것은 모르는 새에 ‘상식’과 같은 일이 되어 있다. 의도했건 그러지 않았건 흔히 그러하니까. 이 상식은 이런 작은 균열들로 인해 결국에는 무너질 것이다. 강남미녀들의 ‘한심한 짓’을 비웃을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심한 짓’을 할 필요가 없도록 이 ‘한심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의견을 바탕으로 그 만화가의 모든 것을 비난해서는 안 되며, 이런 혁명적 행동을 이유로 이 집단의 과를 모른체 하는 것도 옳지 않다. 물론 그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근거로 이 혁명을 부정해서도 안된다. 황희 정승의 유명한 일화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구나”는 그저 분쟁을 싫어한 한 노인의 방관적 입장이 결코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옆 테이블에서 “전라도에 편견을 안 가지려고 하는데 깽깽이들은…”운운하는 저 작자는 정말로 전라도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는걸까? 그리고 그 남자를 한심해하고 있는 나는 그 한마디로 저 남자에 대한 평가를 결정한 것에 대해 진정 부끄러워하고 있는가? 나는 진정 상식의 붕괴를 믿고 있는가? 그 붕괴를 견딜 용기는 있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