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현실과 이상

 몇 주 전 밤, 산책을 나갔다가 목격한 일이다. 작은 골목길을 건너려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 길을 가로질러 가려는 차가 마주쳤다. 골목이라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보행자가 건너지 않고 기다릴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무리중 한 남자가 슥 앞으로 나섰다. 차는 브레이크를 밟았고, 그의 일행들은 뒤에서 그를 붙잡았다. 어찌됐든 차는 먼저 지나갔고, 타박하는 일행들에게 남자가 말했다. “뭐 왜, 사람이 먼저라고 사람이.”

 이 일을 목격하고, 나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것의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이상이란 [현실]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는 가치이며 [현실]이란 이상을 포기하고 안주하는 것이라고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두 개념에 대한 깊은 사색도 없이, 위의 막연한 생각을 기반으로 내가 추구해야 할 이상과 안주해서는 안 될 현실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결정해 왔다. 하지만 예의 일화를 목격 한 순간, 나는 [현실]이라는 개념에 대해 너무 야박한 평을 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먼저]라는 것은 이상이다. 이건 이전의 생각과 같다. [하지만 교통의 원활한 흐름과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해서 차가 먼저다.] 이것이 이전에 생각한 현실이다. 그러나 새롭게 깨달은 현실은, [차가 먼저다]가 아닌 [둘이 부딛히면 사람이 손해다]라는 것이다. 이상을 포기 운운하는 것은 어찌됐든 선택을 했다는 얘긴데,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상을 지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바로 현실인 것이다.



 생각을 더 발전시켜보려고 했지만, 언뜻 떠오르는 생각만 해도 너무 광범위하여 이 주제에 대해 여러번에 걸쳐서 새로 포스팅해야 할 것 같다.

2014년 10월 16일 목요일

10. 16.

 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말은 아닌데, 요즘들어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사회를 묘사하는-예를 들어 신사의 나라 영국 같은-말은 그 사회에 가장 결여되어 오히려 필요한 것을 말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 또한 내가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나를 더욱 몰아세웠던 것도 같고, 열심히 살고 있음을 어필했던 것도 같다. 결과적으로 나는 코너에 몰려 나 자신을 방어하는데 급급한 지경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먼저 내렸으면 해결되었을 일이다. 이유가 없는 노력은 별 보상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고있었다. 현재의 나는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 또한 왜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일까나. 의욕이 꺾였을 때에 스스로 그것을 되찾기는 힘든 일이다. 의욕을 되찾기 위해 그 자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별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열심히 살 이유가 나타날까.

 또 그런 생각도 든다. 애초에 진열대 위에 자리잡은 삶이라는 생각. 누군가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살아왔다는 생각.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는 생각. 나는 왜 음악을 하고 있는걸까. 음악이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내렸는데, 그것을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다.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분명하게 내렸었다. 그것이 즐겁기 때문에. 왜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이제와 들기 시작하는 것은 이전의 답에 무효선언을 내린 것은 아닐까. 음악을 왜 하는지 묻지도 않았는데도 언제나 즐겁기 때문이라고, 이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만둘거라고-그러지 않을까 싶다고 여지는 남겨두었지만-해왔던 나다. 갑자기 이게 다시, 아니 처음으로 궁금해진건 잠시 지쳐있을 뿐인걸까 아니면 정말 뭔가 문제가 생긴걸까.

 즐겁기 때문이라는 말이 거짓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진열대 위의 삶 얘기로 돌아가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대한 답으로 나는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택한 것이 아닌지. 이런 생각이 얼핏 들 때마다 나는, 나의 명예욕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아이돌밴드들을 떠올리며 ‘그래, 나는 저런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니잖아’, 하고 생각했다. 그게 자위는 아니었는지? 그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나를 보면 저런 삶은 내가 원하는 [인정받는]삶은 아니었으니까. 영혼없는, 껍데기뿐인, 진실되지 못한 인생이란 별 거창한게 아니라 이런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이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는게 생각이 났다. 4년도 더 된 일이다. 올림픽에서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던 순간. 당시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것이다. 문제는 그 시점이다. 내 눈물샘은 김연아의 연기를 보는 동안이 아닌, 혹은 연기가 끝난 후가 아닌, 바로 점수가 발표되던 순간에 반응했다. 당시에는 확신하지 못했었는데, 왠지 지금은 확실히 그랬었다는 기분이 든다. 그때의 마음이 내 속물같은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지금의 기억이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 요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때도 내 확신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를 또 해보자. 지금의 나는 누군가 열렬히 사모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책이자 동시에 또 다른 문제이다. 불특정 다수가 아닌 단 한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삶이라는 것 말고는 다를게 하나도 없다. 그 한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엄청 열심히 살긴 하겠지만, 그 방향이 좀 모호해진다. 생각해보니 분명해진다. 연애가 잘 되는 동안, 나는 모든 부분에 과부하를 걸고 굉장히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그 연애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내가 무얼 해도 딱히 잘 보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추진력을 잃는 것이다. 낙하운동과 가속도운동이 물리적으로 동일하듯, 이런 식으로 열심히 살게 된다 한들 진정성 없는 삶이라는 본질은 같다.

 결론은 이미 옛날에 난 것 같은데, 그 결론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혹은 받아들여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 같다. 시험문제는 결론을 내리면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데, 이 결론은 새로운 문제로 다가온다. 더 크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아 힘들다 자유로운 삶이. 책임져야 하는 삶이. 제도권교육 안에 있을때가 마음은 편했지. 휴


*사실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 뿐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왜]를 생각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왜] 모든것에 대해 [왜]를 던져야 하는가.

**[왜]를 한글자로 묶어두니 굉장히 어색하다.

***이 글을 쓰는 순간조차, 내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이런 뭔가 가치있어 보이는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된다. 그래서 아직은 블로그 주소를 오픈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하루 자고 나면 모든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메시에 목록

최초의 3분(스티븐 와인버그, 양문)읽는 중이다.
메시에 목록은, 혜성을 찾는데 방해되니 보지 말하야 할 것들에 대한 목록이란다.ㅋㅋㅋ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블록블록

휴대폰으로 긴 글을 작성하는 것이 굉장히 불편하고
집에서 데스크탑으로는 영화만 보기 때문에
맥북을 사면 블로그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맥북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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