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7일 수요일

구원자

 나는 스스로 꼿꼿이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역시 꼿꼿한 멋진 사람과 나란히 있도록. 때로는 내게 기댈 수도 있도록. 그러나 나는 너를 구원자로 여겼나보다. 인생을 구원해 한명의 메시아라고 여겼나보다.

 구원자이자 절대자인 네가 어린양을 버리는 것을 상상할 없는 모양이다. 네가 나를 신경쓰고있기를 바란다. 바라게 된다. 문득문득 제정신이 때면 그런 헛된 상상은 하지 않으려 하지만, 멍하니 있다보면 또다시 그런 것을 바라고 있다. 아니, 마치 이미 그런 처럼 상상하고 있다. 너는 대체 내게 무슨 의미인가. 이건 나의 병적이고 비정상적인 집착인가, 감당할 없는 크기의 사랑인가.

 글로 적어보니 조금 명확해지는 같다. 이건 아무래도 병적인 집착에 가까운 같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사랑의 진실됨을 부정하는 것과 같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진실된 마음을 가졌지만,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선을 넘으면 집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나를(그리고 어쩌면 역시를) 괴롭히는 집착을 버린다고 해서 마음이 거짓이거나 부족했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이제서야 처음 깨달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나를 차분하게 하려 때면, 어김없이 망령이 되살아난다. 행복했던 과거에 머물러 현재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그때로 되돌아가려는 추억의 망령.

 함께 밤바다를 보고 돌아와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말해준 그녀가 생각난다. 성곽을 따라 길을 걷다 찾은 좋은 자리에 앉아서 하염없이 밤소리를 함께 듣던 그녀가 생각난다. J 가족과 함께 갔던 드라이브, 햇빛이 눈부시게도 부서지던 저수지변에 함께 앉았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계속 생각난다. 미래의 암시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저 인생 한때 찬란히 빛나고 저물어버린 과거의 그림자가 되었다.

 현재의 행복이 끝났다고 하여 과거의 행복이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과거의 행복이 인생에 다시 없을 최고의 축제였다고 해도, 축제는 언제든 끝날 있다. 축제가 막을 내릴 때에, 함께 마무리하자. 기를 쓰고 놀려고 하면, 진상이 뿐이다. 폭죽이 터질 모든걸 후회없이 태워버리고, 날이 밝아오면 집에 가서 자자. 지금 길거리에서 잠들기 일보직전이다. 집으로 가자.

2020년 5월 20일 수요일

오캄의 면도날

 모호한 상황 아니라 명확한 사건조차도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성일까? M 명확한 입장표명을 자꾸만 내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해석하려 들게 된다. 가정의 단계가 늘어나면, 그때마다 불확실성이 추가된다. 내가 희망하는 해석은 가정이 너무나 많다. [~라서 안되겠다] 말이, [~ 감당해내야 한다] 의미이기를 희망하게 된다.

 안된다는 말은 안된다는 뜻이다. 거절이라는 말은 거절이라는 뜻이다.

2016년 11월 2일 수요일

한 번도 본 적 없는 네가 그리워졌다

 날씨 탓도 있을 것이다. 아니, 아마 날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네가 그리워졌다.

 하늘이 무척이나 파랗고 쨍했다. 올 겨울 오리라 알려진 기록적 한파의 예고편 쯤 된다고 했던 예보는 아주 정확하진 않았다. 아침산책길은 걱정한 만큼, 혹은 기대한 만큼 춥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꽤나 추운 날씨이긴 했고, 어느 세탁소 앞을 지날 때엔 너의 향기가 불쑥 코를 찔렀다. 날씨와 그 향기가 만나자, 요사이 어렴풋이 맴돌던 네가 순간 선명해졌다.

 너는 스웨터를 입은 몸을 꼭 끌어안으면 맡을 수 있는 섬유유연제 향기였다. 티셔츠나 수건을 세탁할 때에도 넣었을 섬유유연제이지만, 유난히 스웨터에서 더 맡을 수 있는 그 향기였다. 그리고 바로 너를 안은 그 때의 촉감이었다. 내 품에 안긴 몸은 이상하게도 생생하며 동시에 흐릿했다. 폭신하지만 단단했다. 그 단단함을 좀 더 떠올려보려고 하면 너는 모래알처럼 손아귀에서 흘러나갔다.

 또 너는 난로의 온기에 발갛게 상기된 볼이었다. 열이 올라 따뜻해 보이지만 손을 대면 실은 차가운, 그러면서도 보드라운 볼이었다. 그 볼에선 추운 날씨에 힘을 준 솜털과 네 숨결이 느껴졌다. 너는 차가운 손을 꼭 쥐었을 때 내 손에 가득한 바로 그 느낌이었다.


 긴 소매 끝에 살짝 나온 손 끝으로 터틀넥 스웨터의 목을 끌어올려 입술까지 덮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무척이나 그리웠다.

2016년 5월 30일 월요일

믿음은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공직자는 무릇 청렴해야 한다”위 명제에는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이견이 있다 한들 함부로 공개적으로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이는 이 명제가 상식이거니와, 하나의 도덕률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문장 자체가 상식이라고 해서 그 의미까지 모두가 훤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가 공직자이며, 왜 청렴해야 하는걸까?

 사전을 찾아보면 공직자는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며, 공직이란 관청이나 공공 단체의 직무를 말한다. 또한 관청은 국가 사무를 취급하는 국가 기관을, 공공 단체는 국가로부터 그 존립의 목적이 주어진 법인을 지칭한다. 쉽게 말해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국가론에 대해서까지 얘기하기엔 내 지식수준이 너무 가련하기에 상세히 얘기할 순 없지만, 기본적으로 국가기관은 국민들의 일을 대신 하는 곳이다. 국민은 그 댓가로 세금을 모아 내어 국가의 일을 할 자금을 모으고, 공직자의 인건비를 충당하는 것이다. 대가를 받고 일을 대신 해 주는 만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사용자인 국민들에게 알려주어야만 한다. 여기까지가 의무이다. 그들이 청렴하지 못하게 일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걸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린 더이상 그들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측면에서 공직자가 청렴해야 하는 건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서다. 이상적이고 순진한 얘기다. 아마도 청렴하지 못할 바에야 더이상 그 일을 하지 않아도, 그 대가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지저분할 것이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줄 의무를 강제할 자들 또한 그들 자신이기에 일이 제대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이다. 일을 제대로 하라고 준 권리, 혹은 대가를 이용해서 의무를 가려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려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다. 범위를 국가에서 하나의 동아리로, 극적으로 좁혀보자. 범위가 좁아지면 내 피부에는 더 가까워지는 법이다. 동아리의 임원은 법적인 정의에 따라 공직자는 아니다. 하지만 철학적 의미에서 국가의 공직자와 동아리의 임원은 궤를 같이 한다. 그들은 일의 대가를 받아야 하고, 늘 의심받는것이 자연스럽다. 믿음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데 믿음을 받는것은 요행일 따름이다. 남이 나를 의심할 이유는 많은데, 반대로 믿어주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의심받지 않으려면 사전에 모두 보여주면 되고, 의혹이 생긴다면 해명하면 될 일이다. 나를 의심한다고 해서 화낼 이유가 없다. 인간적으로 섭섭할 수는 있겠으나, 의심받고 또한 해명하는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일이다. 그 일 하라고 앉혀놓은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응당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 실상은 그냥 총회날 안 온 놈에게, 만만한 놈에게, 친한 놈에게 임원을 시켜 봉사하게 만들고 있으니 결국 이것도 한낱 이상적인 얘기지만.

 나는 밴드를 하나 이끌고 있고, 몇몇 음악인들로 이루어진 소모임의 리더를 맡고 있다. 전자야 뭐 그렇다 치고 후자는 리더라는 표현이 좀 민망하지만, 모임 내에서 주로 일을 벌리고 맡아 한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내가 일을 맡아 하는 대신 얻는 댓가는 그 단체에서 벌리는 일을 내 뜻과 비슷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차후 내 자신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으니, 그리고 그게 누가 나에게 강요한 것이 아닌 스스로 하는 기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밴드에서도 모임에서도 내가 하나씩 크게 말아먹은, 혹은 지연되는 일이 있는데, 그럼에도 너무나 감사하게도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는 정도는 아니다. 첫째로는 그들의 후한 인품 덕분이고, 둘째로는 내 노력을 잘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창 일을 크게 벌리던 때에는 매월 회비 사용내역을 원단위로 상세히 공개하고, 회비는 모두의 동의를 거쳐 결정하여 걷었다. 어떤 일을 벌릴 때에도 전원의 동의 없이 하지 않으려 애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땐 설득하거나 일 자체를 접어버린다. 그런게 쌓여 지금은 내가 조금 태만해도 감사히 계속해서 믿어들 주시는 중인 것 같다. 감히 내 스스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대체로 믿음은 이런 식으로 얻어내는 것이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봤던 어떤 글을 보고 생각이 들어 써보았다. 대나무 숲에 올라온, 회비 걷어 남은 돈은 어디 숨기냐는 글이었다. 그 글도 약간 치사한 면은 있었지만, 댓글은 대체로 비난 일색이었다. 제일 한심한 건 ‘네가 하면 되겠네’류의 댓글들이었다. 대학생씩이나 되는 분들이 어디 그런 유치한 말씀을. 대체로는 ’안 해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모른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어디 그런 당연한 말씀을. 안 해보면 당연히 모른다. 아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자들이 알려주는게 의무다. 초반에 말했듯, 그들 자신을 위해서다. 의심받기 싫다면 그런 일은 누가 물어보기 전에 대답해주면 된다. 그게 귀찮으면 의심받고 나서라도 해명해주면 된다. 다만, 반복되는 의심은 신뢰를 무너트리고 무너진 신뢰는 다시 회복되기 쉽지 않으므로 애초에 의심받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는게 본인 신상과 정신건강에 좋다.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이런다’는 의견도 많았다. 해야될 일을 안해놓고 힘들어서 그랬다는 투정은 아무도 안 받아준다. 믿음은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덧붙여, 의심하는 자들은 상대에 대한 예의상, 찾아볼 수 있는 정보는 좀 찾아보고 의심하는게 좋다.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으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힘 빠진다.